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일본에 남은 것은 어머니와 딸 뿐이었다. 혼자 사는 노모가 걱정된 딸은 매달 도쿄에서 오사카의 본가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러한 딸에게 어머니는, 문득 당신이 제주 4.3의 체험자라는 말을 꺼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어머니는 자신이 제주 4.3에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1948년 11월, 제주섬 사람들은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여긴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 피난길에 오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디서부터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산 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곧 돌아갈 생각으로 따뜻한 감자를 나눠먹으며 장가갈 걱정, 집에 두고 온 돼지걱정 등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데...

2014년 3월, 홍대에서는 성기완, 씨없는 수박 김대중, 갤럭시 익스프레스, 구남과 여라이딩스텔라 등 많은 음악인들이 제주 4.3 당시 불리던 노래들을 복기했다. 이 곡은 제주 4.3 생존자 김민주 할아버지의 노래를 백현진과 (故)방준석이 다시 불렀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에 제주 4.3 사건 이야기와 그 시대에 음악을 만들었던 음악인의 마음을 담았다.

해방이후 남한에서의 민간인 집단학살은 1946월 8월 화순탄광사건과 대구 10월항쟁으로 시작됐다.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해 남한 전역으로 확대된 대구 ‘10월 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항일독립군을 토벌하고 고문•처형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청산되지 않고 미군정에 의해 경찰과 국가기관의 수장이 되면서 이후 자행될 민간인학살의 전주곡이었고, 반역사의 시작이었다. 숙청되어야 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미군정과 이승만에 기대여 살 길을 찾은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 척결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가리고 생존을 위해 반정부주의자, 좌익세력, 민족주의자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 주민들의 78%가량이 사회주의를 원했고, 14% 가량만이 자본주의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와 우익인사를 기용해 정치적 걸림돌이 되는 집단과 민간인을 학살했다. 1947년부터 불거진 제주 4.3항쟁과 1948년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은 보수우파와 좌익세력을 제거하며 본격적인 반공국가 건설에 들어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민간인 대량학살은 본격화 된다. 좌익인사를 선도하고 계몽하기 위해 설립한 국민보도연맹은 한국전쟁 초기에 대량 학살 대상이 됐다. 친일 출신의 군인과 경찰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더욱 참혹한 학살극을 벌인 측면도 있다. 한국전쟁으로 전시작전권을 이양 받은 미국도 민간인학살의 주체가 되었다. 이 시기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 지방좌익에 의해서도 민간인학살은 자행됐다.

1948년부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었다.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공산 빨치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섬 주민 3만여 명을 학살하고 집을 불 질렀다. 제주 4.3 피해자의 상당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입은 피해는 오래 알려지지 못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 헌신적인 제주 4.3 연구자의 길을 따라가며, 어둠 속에 봉인되어 온 제주 여성들의 경험, 침묵 속에 잠겨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 살고 계신 강상희 할머니, 할머니의 남편 김봉수는 4.3으로 희생되었다. 해군기지 문제로 떠들썩한 서귀포시 강정마을. ‘4.3의 원혼이 통곡한다’ 와 같은 수많은 현수막이 제주 4.3과 해군기지 문제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카메라는 유령처럼 제주도 납읍리, 가시리, 강정마을, 일본 오사카 등을 돌며 그 흔적과 균열들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다시 강상희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집 앞마당으로 돌아온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잠자리 밑에 녹슨 톱을 두고 살아온 할머니의 삶...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짊어진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의 삶에서 녹슨 톱은 언제쯤 치워질 수 있을까.

4.3 항쟁의 구술 작가인 양경인과 한국으로 유학 온 르완다인 파치스가 마주 보고 대화한 다음 나란히 손을 잡고 여행을 떠난다. 세대도 국적도 하는 일도 다른 두 사람은 대학살 생존자의 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기사를 통해 할아버지 서옥이 4.3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훈은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처음에 카메라 앞에서 말하기를 꺼렸던 서옥은 손자가 원하는 말을 조금씩 꺼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서옥은 예상치 못한 증언을 한다.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고 놀란 지훈은 끝까지 카메라를 겨누며 서옥의 이야기를 쫓는다.

여기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다섯 명의 여성이 있다. 1940년대 후반, 스무 살 내외의 젊은이로 제주 4.3을 겪는 와중에, 그중 네 사람은 심지어 재판도 없이 전주형무소로 보내져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다. 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겪었던 4.3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4.3은 단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일이 아니었고 당시 제주도에 국한된 일만도 아니었다. 4.3이 일어난 지 7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주4.3도민연대에서 준비한 재심 재판을 통해 이분들의 무죄가 인정되었다.

제주의 일제 동굴진지와 4.3과 관련된 동굴들, 그 동굴이 품은 바다 이미지를 다각도로 들여다보았다. 밖에서 동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검고 어두운 카메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밖을 보면 동굴의 입구 형태만큼 스크린이 되었다.

2003년 10월 15일, 한적한 가을의 어느 고층 아파트. 한가로이 베란다 화초에 물을 주는 황가. 그리고 같은 시간. 도시 변두리의 낡은 집에서 살아가는 60대 노인의 형민. TV 지방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확정 소식’은 두 노인의 닮아있지만 서로 다른 과거를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