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기 뮤지컬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콘서트 그룹 중 하나인 마리아와 폰 트랩 패밀리 가수들의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를 생중계한 라이브 TV 드라마를 통해 런던의 쓰리 밀스 스튜디오(Three Mills Studio)의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생생하게 재현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 지역에서 진행된 연합군 구출 작전. 영화는 세개의 시공간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도버 해협을 건너려는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선박들의 자발적 참전과 차출이 이어지는 바다에서의 하루, 적기를 겨냥한 스피트파이어기 전투사가 있는 하늘에서의 한 시간. 전쟁의 전방위성, 공포의 상시성과 그 압도, 개별 공간을 떠난 공포의 유사성, 그 속의 다급함이 혼재되어 있는 가운데 전쟁과 죽음에의 공포와 생존을 향한 인간적 열망을 그린다.

헐리우드 유명 배우를 꿈꾸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무대 위해서 준비한 걸 뽐내지 못하는 배우 지망생 그렉 세스테로 앞에 자신감이 넘치는 배우 지망생 토미 웨소가 나타난다. 같은 꿈을 가지고 급격히 친해진 그렉과 토미는 대스타가 되길 꿈꾸며 LA 로 떠나지만, 끼도 재능도 없고 열정만 있는 두 배우에겐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캐스팅 근처에도 못 가는 토미는 불현듯 더 이상 캐스팅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시나리오 집필부터, 감독, 연기, 600만불에 육박하는 제작비 조달까지 1인 다역을 하며 영화를 완성해낸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하자 쿠웨이트에 살던 부유한 인도인 기업가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군에 저항하며 17만 명이 넘는 인도인의 피난을 돕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방어 불가 지상 최악의 전초기지! 적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곳 아군의 지원은 물론 제대로 된 보급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군 조사단조차 ‘명백히 방어 불가능’ 이라는 판정을 내린 상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적들로, 매일매일이 위험한 상황 속 총공세가 시작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시절, 어느 부유한 미망인이 아마추어 고고학자를 고용해 자신의 땅에 있는 무덤들을 발굴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이룬 그들.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는 영국에서, 머나먼 과거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1912년, 천사를 만난 10대 소녀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선지자로 소문이 퍼진다. 그 후 마리아에게 재산을 받치고 헌신하는 추종자 무리가 생긴다. 1927년, 핀란드 코콜라에서 생활하던 마리아 추종 단체가 마부 소년 순델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이 밝혀진다. 마리아와 추종자들은 쫓기듯 그곳을 떠나 핀란드 수도 헬싱키 토이볼라로 이사한다. 어릴 적부터 추종 단체에서 생활한 살로메는 어린 여자 아이들을 보살피는 신실한 여인이다. 어느 날, 마리아의 장부 기록 등을 도와주던 살로메는 시내에서 경찰에 쫓기던 남자가 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그때 거리에서 방황하던 17살 소녀 말린이 살로메에게 다가와 인사한다. 얼마 후 코콜라의 베넬리우스 검사가 기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인 것처럼 암시하여 추종자들에게 베넬리우스를 암살하도록 지시한다. 그 일로 마리아와 에이노는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된다. 한편 심하게 맞아서 다친 말린은 살로메의 도움으로 토이볼라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송 중이던 마리아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다시 토이볼라로 돌아오는데...

지난날의 잘못으로 인해 가족에게 버림받은 재구(윤박)는 도박장과 공사판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다 우연히 밥을 얻어먹기 위해 들른 장례식장에서 순식(신정근)을 만난다. 세상 착해 보이는 순식을 본 재구는 오갈 곳 없던 차에 만취한 순식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접근해 하룻밤 신세를 진다. 재구와 순식은 다음 날 아침 헤어지지만, 퇴근 후 집에 온 순식은 다시 돌아와있는 재구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가족 밖에 모르는 아빠 순식과 엄마 애심(장소연) 엄마 아빠를 지키는 씩씩한 딸 순영(고나희) 그리고 이들의 일상에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재구 재구는 ‘불청객’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