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765,000kV의 거대한 송전탑과 맞서 싸운 김말해 할머니 투쟁의 시작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전후 국가에 의해 은폐된, 민간인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한 사건. 김말해 할머니와 또 다른 김말해'들'은 이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피해 규모도, 희생자 수도 알 수 없는 상황. 한국전쟁 정전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시간은 멈춰있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을 주도하던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공동조사단을 꾸려 그들을 찾아 나선다.

전시의 선전영화들이 그렇듯 이 작품도 미 해군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의 한국의 모습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UN군의 모습을 담았다. 당대의 다른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컬러로 만들어졌으며, 기존의 영상자료를 활용하지 않고 새로 촬영한 영상을 사용했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선전영화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드는 중립적인 관찰자적 시선을 견지하려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2차 세계대전 끝난 후에 만들어진 최고의 전쟁기록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컴맹’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일 년간 둘째 딸인 ‘나’에게 마흔세 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다시 열어본 메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가족 모두에게 건넨 자신의 이야기였다. 6.25 전쟁, 월남전, 88올림픽 그리고 아파트 재개발 광풍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질곡마다 아버지의 발자국은 작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당신의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가족의 삶도 함께 흔들렸다. 당신의 삶은 나의 가족사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야 나는 아버지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려고 한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10만 명의 전쟁고아들이 발생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능력조차 없던 시절, 남과 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고아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남한의 전쟁고아들이 ‘해외 입양’이라는 방식을 통해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면,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 여러 나라에 분산 수용되는 방식이었다. 이름하여 현지 ‘위탁 교육’이었다. 그 결과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낯선 곳들에서 5천 명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북한 전쟁고아들이 10년 동안 생활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숨겨져 있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재미 한국인 생존자 4명의 지극히 개인적인 증언을 통해 군사 분쟁에 서의 인적 희생에 초점을 맞춘다. 대규모 폭격, 생존을 위한 매일의 투쟁, 휴전선으로 인한 가족과의 생이별 등 이들의 이야기는 관객을 전쟁의 궤적 속으로 끌어들인다. 수십 년 후, 생존자들은 북한의 친척과 상봉하게 되는데, 이 장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족 상실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총성이 그치면 전쟁도 끝난다는 개념이 착각에 불과함을 보여주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군사 분쟁 속에서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 많은 이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